많은 신경과학자들이 철학에서 말하는 자아는
뇌의 화학물질과 전기적 신호의 자극에서 비롯되는 것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한다.

비단 자아뿐만 아니라 인간이 갖는 모든 사유는
전기적 신호의 반응일 뿐이라는 쓸쓸한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나는, 또 위험한 생각들에서 과학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유한한 모습, 그 한계적인 모습에서 형이상학적인 사유를 하는 것은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에 대해서 한 가지 꼭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많은 철학자들, 그 중에 염세주의적인 이들은 사랑이 단지 종족 번식을 위한 섹스의 과정으로 연결시키는
유전자적인 반응일 뿐이라 말한다. 포르노 배우와 애인을 볼 때 나타나는 남성의 신체적 변화가 동일하다는 실험은
타당성적인 부분에서 오류가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결국 사랑은 성욕이고 도파민의 분비로 인한
특정한 느낌일 뿐이라고 입을 모은다.


사랑, 정욕과는 다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이 동성이라면? 물론 오르가즘을 위한 섹스가 존재하긴 하지만 종족번식과는 전혀 상관성이 없다.
혹자는 동성연애야 말로 순수한 의미에서의 사랑과 가장 근접하고도 말을 하는데 절반은 동감하고 절반은 유감스럽다.

정욕과 사랑은 구분되어야 한다. 섹스를 위한 감정은 정욕일 뿐이다. 종족번식을 위해서
상대방을 찾고 호르몬의 과분비, 성적인 흥분과 사정, 그리고 근육의 이완에서 오는 오르가즘은 정욕에 불과하다.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수십 년 간 여전히 망자를 잊지 못하고 사랑하는 이는 어떻게 설명해야만 하는가?

설령 자신의 종족을 번식시켜 줄 '더 나은 여성' 을 찾지 못한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서 성립되는 현상이라고
과학적으로 풀이한다고 할 지라도,

우리는 형이상학적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만약에 사랑이 정욕과 다름이 없고 단지 섹스가 주어인 문장의 형용사로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과학적 사실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넘어서는 사랑, 필로아적인 사랑, 순수함에 닿은 사랑을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자아가 단지 뇌의 전기적 신호에 의한 망상일 뿐이라면 왜 그렇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자아를 찾기 위해
삶의 본질을 사유하고 괴로워하는 것일까? 그저 헛개비에 불과하다면 그런 소모전은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슬픈 사실이 있다. 만약 육체적 사랑이 전제되지 않고 정신적인 사랑만을 강요하게 된다면
사람이 아닌 동, 식물에 대해서도 "사랑"이 성립되게 된다. 그러기에는 범위가 너무 광의적이다.
플라톤도 죽기 전에는 육체적 사랑이 밑바탕이 되지 않는 정신적 사랑은 불신하지 않았는가?



이상주의자, 염세주의자, 과학신봉자, 회의주의자. 이런 이성적인 입장에서 한 발을 빼고 사랑을 보자.


우리의 존재를 사람답게 살게 만드는 힘이 자아가 아니던가?
우리를 세상과 소통하게 만드는 힘이 사랑이 아니던가?

섹스가 무엇이든간에, 설령 섹스가 사랑의 주를 이루는 요소이든간에, 사랑은 순수해야 한다. 그 순수성에 대해서
정욕이 단어를 더럽히지 않도록 정신적인 교감이 견제를 해야만 할 것이다.



사랑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기껏해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의 사랑은 지배의 열정이고 정신의 사랑은 동정이며,
육체의 사랑은 많은 비밀이 있은 후에 사랑의 대상을 소유하려는 은밀하고도 미묘한 욕망일 뿐이다.
아아, 얼마나 멋진 말인가. 라로슈푸코의 말. 줄리어스도 이 말에 동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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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줄리어스
연애는 언제나 종족의 번식을 위한 본능에 따른다.
남성의 사랑은 성관계를 가진 순간부터 뚜렷이 식어버려 자기 손에 넣은
여성보다 다른 여성이 나아 보인다.
그래서 남성은 언제나 여성을 바꾸고 싶어하지만, 반대로 여성의 사랑은 성관계를 끝낸 순간부터 커진다.
이것은 자연이 종족의 유지와 되도록 많은 번식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남성은 사정이 허락되면 1년에 100명이 넘는 자식을 낳을 수 있으나,
여성은 아무리 많은 남성을 상대해도 쌍둥이를 제외하고는 1년에 1명이상 낳을 수 없다.
그래서 남성은 언제나 다른 여성을 탐내나, 여성은 한 남편에게 충실히 의지하려 한다.
이는 자연이 본능을 통하여 그렇게 무작정 강제하는 것이다.

- 쇼펜하우어, 인생론




쇼펜하우어가 간과한 것은 사랑이 사랑을 하는 대상들을 맹목적으로 만들어서
서로의 부조화가 보이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다.

만약 쇼펜하우어의 말마따나, 섹스를 위해서 - 종족번식을 위해서 이성을 만나는 것이라면
불임인 여성과 결혼하는 남성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될까?

상대방의 외모가 아름다워서, 또는 성격, 재력 등에 의해서 사랑을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런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사랑은 무릇 그것이 끝나버릴 때 종결되기 마련이다, 아니 그럴까?

하지만 간과해선 안되는 사실은 비단 특정한 원인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이라고 할 지라도
그것이 맹목적으로 되어서 상대방의 부조화를 인지할 수 없게 될 때 사랑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주 아름다운 여성을 사랑하게 되었으나, 그 외모를 잃었을 때 사랑이 종결되지 않는다면
어떤 특정한 다른 원인에 귀속되었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의 본질인 "순수함" 에 다가선 것은 아닐까?


사랑을 너무도 형이상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동기와 욕구라는 과학적인 실험 결과 앞에서 사랑에 대한 나의 사유는 힘을 잃어 버리지만,


톨스토이가 그랬지 않는가. 사랑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사랑을 파괴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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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줄리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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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사진 예술을 하는 선배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이야기와 레드리본제, 레이소다의 카테고리 폐쇄에 이르러서는
너무도 화가 난 적이 있습니다.

예술과 외설에 대한 차이를 내게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작가의 양심"이 그 답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일단 온라인, 포르노 사이트가 아닌 이상 포스팅된 작품이라면
우리는 작가의 양심을 믿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작가의 양심을 믿지 않고 개인적 경험과 비좁은 가치관에 근거하여
작품을 비난하고, 봐야 될 나이를 규정하며, 심지어는 법에 어긋난다며 처벌을 내리기도 합니다.

이 어찌 가당한 말입니까? 예술을 우리의 편협한 가치관이 탄압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젖을 무는 아이의 사진에서 노출된 어머니의 유두와
젊은 여성의 젖을 무는 남자의 사진에서 노출된 그녀의 유두는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전자는 食 이고, 후자는 性 이라서 그런 것입니까?

섹스는 인간의 본질적 활동에서 食 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행위입니다.
衣 와 住 보다 중요한 부분입니다.

반면에 살인과 같은 폭력을 다루는 문제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대합니까?
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게임은 미성년자도 즐기고 있으며 대중매체에서도 흔히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여성의 특정 신체 부위를 性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개인의 경험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 경험이라는 것은 한국에서 살면서 겪게 되는 문화적 자극의 결정체입니다.

유전적인 구조로 남성은 시각적인 자극에서 성적인 흥분감을 취하게 됩니다.
또 가치관이 완전히 자리잡을 때까지, 아니 섹스를 했다고 말을 해도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지 않을
나이가 될 때까지 섹스라는 코드를 가진 매체, 음란물이라 지칭되는 사진, 그림, 음악, 글 등은
저속한 것이며 지양해야 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지닌 채 성장을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고착된 가치관은 변하지 않아서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동일한 교육을 시킵니다.
그리고 여성의 유두가 노출이 된 사진을 미성년자가 보지 않도록 환기를 시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요. "교육 상 좋지 않아요."

사람은 자신의 가치관이 틀렸다고 생각하기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자신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통념으로 생각하는 것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유교 사회에서 폐쇄적인 성 문화를 가진 한국은 레비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에서 말한 것처럼
"불쌍한 존재는 바로 동아시아의 남자들" 투성이의 나라입니다.



시각적인 성적 자극은 유방, 성기 등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여성의 발목을 보며
흥분을 하고 또 누군가는 목선, 손가락 심지어는 귓볼을 보고도 성적인 자극을 받습니다.
그런데 목선을, 발목을, 손가락을 찍은 사진은 왜 미성년자 관람불가가 되지 않습니까?

절대 다수는 유방과 성기를 보며 성적인 흥분을 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안되는 오류가 여기에 존재합니다.

남성의 이러한 페티쉬(fetish) 성향은 유전적이고 본능적인 것입니다. 액셀레이터를 밟으면
전진하는 차를 두고 왜 앞으로 가냐고 물을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가지 않기 위해 브레이크를
밟아야지, "앞으로 가지 마" 라고 명령을 하는 것은 우스운 짓 아닙니까?

특정한 부분이 사진에서 다뤄진다고 할 때 그것을 섹스로 연결시켜서 성적으로 흥분하는 것은
관람자의 수준에 달려 있습니다. 누드 사진을 보며 자위를 하기로 마음 먹은 사람은
그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이 세상 모든 누드 사진은 외설이오, 음란물입니다.

우리가 작가적 양심을 믿는 것처럼 작가도 우리에게 관람자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을 기대합니다.



일전에 제가 최근의 사진 이해의 경향은 작가의 의도나 지향점에 주의하지 않고
관람자 스스로의 무의식 상태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작가의 의도를 무시해선 안 됩니다. 허나 무엇보다도 경계해야 할 것은
독단적으로 자의(自意)적 해석을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가치관에 근거하여
마음대로 사진을 평한다면 그 어찌 바보같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단맛을 느끼지 못하는 혀를 가진 이가 설탕을 보고 짜다고 말하니 웃지 않을 수 있습니까?



견월망지(見月望指)라, 달을 보라고 손짓을 하였더니 손가락을 본다는 말이 있지요.

예술로 포스팅된 사진을 포르노 사이트에 게재되는 사진으로 읽어 버리는 사람은
더이상 담론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패럴리즘이라고 합니다.

패럴리즘으로 사진을 엉망으로 해석하는 이를 두고서 작가적 양심을 믿으라고, 또 관람가적 예의를
기대할 수 없음은 무척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첨부된 사진은 아라키 노부요시의 사진입니다. 여성의 성기를 꽃과 입으로 자주 표현합니다.
여성의 성기가 더럽습니까? 오직 섹스로만 생각이 집중됩니까?

탄생과 죽음과 욕망과 기쁨과 쾌락과 배출의 객체로서는 느껴지지 아니한가요?

음모와 머리카락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자라는 곳이 다를 뿐 구태여 전자는 성적인 자극의 매개체라고
스스로 인식화된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그려가며 사고를 편협하게 해야만 할까요?



개인적으로 김용호 사진작가를 참 좋아합니다. 그가 운영했던 카페 드 플로라도 무척 좋아하지요.
이혜영의 누드 사진을 찍은 작가로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패션사진계에서는 도프앤컴퍼니, 김용호라면
둘째가라 말하기 서러울 정도로 유명한 분입니다.

얼마 전에 김용호 작가께서 발레리나 김주원씨의 누드를 찍었습니다.
덕분에 김주원씨는 발레리나의 명예를 실추하였다는 명목으로 감봉을 받았지요.

춤으로 몸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발레와,
사진으로 몸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끝으로 "몸" 사진전을 여신 김용호 작가님의 한 말씀 적고 긴 글 마칩니다.


"인간의 몸은 근원적으론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며, 나아가 환경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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