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신경과학자들이 철학에서 말하는 자아는
뇌의 화학물질과 전기적 신호의 자극에서 비롯되는 것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한다.

비단 자아뿐만 아니라 인간이 갖는 모든 사유는
전기적 신호의 반응일 뿐이라는 쓸쓸한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나는, 또 위험한 생각들에서 과학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유한한 모습, 그 한계적인 모습에서 형이상학적인 사유를 하는 것은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에 대해서 한 가지 꼭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많은 철학자들, 그 중에 염세주의적인 이들은 사랑이 단지 종족 번식을 위한 섹스의 과정으로 연결시키는
유전자적인 반응일 뿐이라 말한다. 포르노 배우와 애인을 볼 때 나타나는 남성의 신체적 변화가 동일하다는 실험은
타당성적인 부분에서 오류가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결국 사랑은 성욕이고 도파민의 분비로 인한
특정한 느낌일 뿐이라고 입을 모은다.


사랑, 정욕과는 다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이 동성이라면? 물론 오르가즘을 위한 섹스가 존재하긴 하지만 종족번식과는 전혀 상관성이 없다.
혹자는 동성연애야 말로 순수한 의미에서의 사랑과 가장 근접하고도 말을 하는데 절반은 동감하고 절반은 유감스럽다.

정욕과 사랑은 구분되어야 한다. 섹스를 위한 감정은 정욕일 뿐이다. 종족번식을 위해서
상대방을 찾고 호르몬의 과분비, 성적인 흥분과 사정, 그리고 근육의 이완에서 오는 오르가즘은 정욕에 불과하다.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수십 년 간 여전히 망자를 잊지 못하고 사랑하는 이는 어떻게 설명해야만 하는가?

설령 자신의 종족을 번식시켜 줄 '더 나은 여성' 을 찾지 못한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서 성립되는 현상이라고
과학적으로 풀이한다고 할 지라도,

우리는 형이상학적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만약에 사랑이 정욕과 다름이 없고 단지 섹스가 주어인 문장의 형용사로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과학적 사실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넘어서는 사랑, 필로아적인 사랑, 순수함에 닿은 사랑을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자아가 단지 뇌의 전기적 신호에 의한 망상일 뿐이라면 왜 그렇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자아를 찾기 위해
삶의 본질을 사유하고 괴로워하는 것일까? 그저 헛개비에 불과하다면 그런 소모전은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슬픈 사실이 있다. 만약 육체적 사랑이 전제되지 않고 정신적인 사랑만을 강요하게 된다면
사람이 아닌 동, 식물에 대해서도 "사랑"이 성립되게 된다. 그러기에는 범위가 너무 광의적이다.
플라톤도 죽기 전에는 육체적 사랑이 밑바탕이 되지 않는 정신적 사랑은 불신하지 않았는가?



이상주의자, 염세주의자, 과학신봉자, 회의주의자. 이런 이성적인 입장에서 한 발을 빼고 사랑을 보자.


우리의 존재를 사람답게 살게 만드는 힘이 자아가 아니던가?
우리를 세상과 소통하게 만드는 힘이 사랑이 아니던가?

섹스가 무엇이든간에, 설령 섹스가 사랑의 주를 이루는 요소이든간에, 사랑은 순수해야 한다. 그 순수성에 대해서
정욕이 단어를 더럽히지 않도록 정신적인 교감이 견제를 해야만 할 것이다.



사랑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기껏해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의 사랑은 지배의 열정이고 정신의 사랑은 동정이며,
육체의 사랑은 많은 비밀이 있은 후에 사랑의 대상을 소유하려는 은밀하고도 미묘한 욕망일 뿐이다.
아아, 얼마나 멋진 말인가. 라로슈푸코의 말. 줄리어스도 이 말에 동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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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줄리어스
연애는 언제나 종족의 번식을 위한 본능에 따른다.
남성의 사랑은 성관계를 가진 순간부터 뚜렷이 식어버려 자기 손에 넣은
여성보다 다른 여성이 나아 보인다.
그래서 남성은 언제나 여성을 바꾸고 싶어하지만, 반대로 여성의 사랑은 성관계를 끝낸 순간부터 커진다.
이것은 자연이 종족의 유지와 되도록 많은 번식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남성은 사정이 허락되면 1년에 100명이 넘는 자식을 낳을 수 있으나,
여성은 아무리 많은 남성을 상대해도 쌍둥이를 제외하고는 1년에 1명이상 낳을 수 없다.
그래서 남성은 언제나 다른 여성을 탐내나, 여성은 한 남편에게 충실히 의지하려 한다.
이는 자연이 본능을 통하여 그렇게 무작정 강제하는 것이다.

- 쇼펜하우어, 인생론




쇼펜하우어가 간과한 것은 사랑이 사랑을 하는 대상들을 맹목적으로 만들어서
서로의 부조화가 보이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다.

만약 쇼펜하우어의 말마따나, 섹스를 위해서 - 종족번식을 위해서 이성을 만나는 것이라면
불임인 여성과 결혼하는 남성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될까?

상대방의 외모가 아름다워서, 또는 성격, 재력 등에 의해서 사랑을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런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사랑은 무릇 그것이 끝나버릴 때 종결되기 마련이다, 아니 그럴까?

하지만 간과해선 안되는 사실은 비단 특정한 원인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이라고 할 지라도
그것이 맹목적으로 되어서 상대방의 부조화를 인지할 수 없게 될 때 사랑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주 아름다운 여성을 사랑하게 되었으나, 그 외모를 잃었을 때 사랑이 종결되지 않는다면
어떤 특정한 다른 원인에 귀속되었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의 본질인 "순수함" 에 다가선 것은 아닐까?


사랑을 너무도 형이상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동기와 욕구라는 과학적인 실험 결과 앞에서 사랑에 대한 나의 사유는 힘을 잃어 버리지만,


톨스토이가 그랬지 않는가. 사랑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사랑을 파괴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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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city

2008/03/24 02:48
시에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나도 오늘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었지만
비가 와서, 또 바빠서, 또 아쉬워서, 또. 그래서 자르지 못했다.
당신은 잘랐다는데, 떨어지는 머리카락에 우리 사랑도 떨어지는 것인지.
머리카락이 많이 길어서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다는 나의 농담이
참말이 되어 버린 것인지. 도시에 내리는 우울한 비에 재즈 한 곡조 태워서
잔에 담아 마시면 울컥해져 당신 생각으로 난 또 몸서리를 치겠지.
너무나도 태연한 모습으로 날 바라보는 당신에게 무한한 공포를 느끼면서
왜 절실한 마음으로 대하지 못하냐며 나는 당신을 다그치겠지.


래, 사라져 버려라. 대지 위에 고인 빗물을 걷어 차며 나는 슬픔을 배설한다.
벌겋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 역겨운 향이 나는 불쾌함, 너무 단 그리움.
청바지에 스며드는 배설들이 내 살갗에 닿을 때 여전히 나는 공허한 마음에
존재의 부재로부터 비롯되는 막막한 상실감이란 칼 끝을 꽂는다.

후문 앞 공터에 핀 개나리의 노랑이 내 병을 도지게 한다.
삶이 비극으로 가득 차 있다. 숨 쉴 때마다 비극의 기운을 길게 내 뿜는다.
도시의 꺼지지 않는 불빛처럼, 도시의 영혼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어지고 있는 이 시간에도 너와 나, 도시의 영혼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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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an with a Parasol

2008/03/10 01:24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가 모네의 이 그림을 처음 실제로 보았을 때의 그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내 몸의 한 곳도 빠지지 않고 흐르던 전기적인 신호는 나로 하여금 이 그림을 사랑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얼마나 오래 보았던가? 두 다리가 저리고 목이 뻐근할 즈음에, 다시 말해
그림을 통해서 생성되는 신호 이외의 다른 추가된 신호가 날 그만 가자고 각성할 때에
비로소 나는 그림에서 눈을 뗐다. 그러나 내가 뗀 것은 눈일 뿐, 여전히 내 마음은 그림을 향해 줄곧 서 있다.

그 때 내 옆에 있었던 MJ 는 그림 속 카미유같은 존재였다. 비록 우리에게 쟝은 없었을지라도
빛을 사진으로 그리는 나는 클로드 모네였고, 그녀는 나의 모델인 카미유였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의 초상화군요" 라고 말하자 그녀는 완벽하게 그 말을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그림에서 동기를 받아 오마쥬로서의 사진을 찍고 싶었다. 나는 모네였고, 카미유가 옆에 있었으며,
좋은 빛만 있었다면 나는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지 못했다. 찍지 못했다.
내일의 이별도 모르면서 영원을 기약하는 오만방자한 내 사랑의 유예기간이 끝나 버렸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까미유가 죽자 모네는 다른 이와 결혼을 한다. 그리고 그의 딸,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딸인
쉬잔을 그린다. 까미유가 죽은 지 7년이 지난 어느 날,
모네는 까미유를 생각하며 딸을 모델로 삼아 추억과 그리움을 붓으로 담는다.

하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까미유의 얼굴이 기억이 나질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녀에 대한 존경이었을까?


계절은 다시 봄이 되었다. 그와 내가 다시 만난 날도 어느 따스한 봄날.
봄의 기운을 머금은 좋은 빛들이 창가를 통과하여 내 뺨에 드리운다.
눈을 감고 열기를 느낀다. 아직은 내가 살아 있구나.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계약하겠지.
그 때도 영원을 약속하는 오만한 내 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이야.

하지만 까미유는, 까미유는 내게 당신 하나 뿐.
좋은 빛과 아름다움과 사랑이 공존하는 순간을 향유하는 까미유는 내게 당신 하나 뿐.


봄날에, 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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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2008/03/09 23:29
사랑하는 마음은 불쑥 내리는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피할 수 없게 만든다.

비에 젖어 감기에 걸리는 것처럼
무책임한 사랑도 마음을 병들게 한다.

사랑한다 말하면 떠나 버리고
사랑한다 말하지 아니하면 떠나 버리고
사랑한다 말해도 떠나 버리고

만날 사람은 다 만나게 된다지만
이별할 사람도 다 이별하게 되는 것인가?

어찌 내일 이별할 것도 모르면서
영원을 약속하는 오만함으로 무장한 채
사랑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의 집 앞에서 오늘도 돌아오는 길에
신호등의 수를 세며 지친 한 숨을 길게 몰아 내쉰다.

그래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외롭고 그리운 것은 매 한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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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들은 그대로

2008/03/09 23:28
나와 당신을 위해 존재하던 모든 것들은 그대로 있네
잘 다려진 빨간 스트라이프 셔츠도
귓가를 맴도는 목소리도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그 씁쓸한 기억들도

나와 당신을 위해 존재하던 모든 것들은 그대로 있네

그런데

안녕이라 말하며 인사를 건넬 때
어색한 음을 띈 적막한 대기가 피부에 와닿는 것일까

그런데

커피콩을 한 손 가득히 쥐어 향을 맡아보고는
시간이 정지해 버리는 것일까


나와 당신을 위해 존재하던 모든 것들은 그대로 있네


그런데

불현듯 우리 둘만 사라져 버렸음을 서서히 알아채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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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여 안녕

2008/02/17 06:03
항상 겨울의 끝자락이 오면 나는 외로워진다.

작년에도, 그 이전에도, 어김없이 올해도
나는 외롭다.

몇 해 전에는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읽었고
올해 나는 마르케스의 책을 읽었다.
그것들은 나의 외로움을 달래 주지 않는다.
타들어가고 말라 비틀어진 내 마음의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장식하는 종처럼
어울리지도, 존재근거도 느끼질 못한다.

벽에 기대어 있는 스노보드를 보며
누구와 탈지를 고민한다.
그녀와 만나고 있을 때는 당연히 그녀와
갔을 스키장이지만 지금은 누구와 가야 하는가?
나는 그녀가 없이는 스키장도 못가는 어리석은 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혼자 지내길 바래왔었단 말인가?

나는 다른 남자들이 이별을 말하면서
"나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나길 바란다." 또는
"나는 네게 너무도 부족한 사람이라서 헤어진다." 라는
터무니 없는 변명에 대해서 코웃음이 난다.
대학 친구가 이런 변명을 하며 헤어짐을 전하였다고
내게 말하였을 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너는 직장에 면접을 보러 가서 면접관에게,
'옆에 있는 사람이 저보다 더 잘 일할 것 같으니 이 사람을 뽑아 주십시오.'
라고 말해라."

착한 역할, 아니 착한 척은 하고 싶지 않았다.
더는 사랑을 못할 것 같았고 그 사람도 날 더이상
사랑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란 걸 우리 서로는 알고 있었다.

더이상 서로의 마음에 낼 생채기도 없음을,
아주 가늘고 약한 끈에 의지하고 있었던 우리 관계의 마지노선이
그 필요성을 잃어 버리고 이제 멀어져야 함을 우리 서로는 알고 있었다.

어떻게, 언제, 누가 이별을 당당하게 말할 지를 고민해야 했다.

CANT 냐, DONT 냐의 질문. 사랑이 동나서 멈춰버린 우리의 자동차에
연료를 주입하지 못하냐, 혹은 않느냐에 대해서 나와 그녀는 어떤 말을 할까?

감정이 과다될 때가 있다. 나는 이를 주의하려고 노력한다.
이 순간, 이 폭발하는 내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면
나는 무척이나 힘들어진다. 나를 감싸고 있는 모든 시간은
정지해 버리고 깊은 정적만이 남는다. 시각은 한 곳에 집중이 되고
그것이 흐릿하게 보일 때 즈음에는 청각이 반응을 한다.
음악소리가 귓가에서 크게 들리면 내 감각은 통제 가능한
범위를 넘어선 것처럼 보인다. 모든 감각에서 의미가 느껴진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만지는 것, 맡게되는 것, 그리고 상상하는 것이
나를 힘겹게 한다. 왜냐하면 언제나 내 감각의 종착역은 외로움이니까.
보이는 모든 것은 날 외롭게 하고 들리는 모든 것은 날 외롭게 한다.
혀 끝에 느껴지는 커피의 쓴 맛도 외롭고, 손 끝에 느껴지는 사진의
입자들이 날 외롭게 한다. 이 지긋지긋한 외로움. 외로움. 외로움.

카메라에 85MM 를 마운트하고 무작정 거리로 나선다. 시간은 새벽 2시다.
갑자기 엘리베이터의 등이 꺼진다. 완전한 어둠이다.
무섭지 않다. 지금 당장 엘리베이터가 추락한다해도,
두 번 다시 문이 열리며 빛이 스며 들지 못한다고 해도,
무섭지 않다. 어차피 나는 지금 어둠이니까.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간다. 그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공황 장애를 겪는다.
가로수 사이마다 불이 켜진 도로를 따라 아무런 생각을 두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나 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들,
아! 너도 지금 이 스쳐가는 시간에서 나와 멀어지며 살아가고 있구나.
"우리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또 나는 외로운 시간 속에서 살아가겠지만
또 당신도 그리운 시간 속에서 살아가겠지만

나도, 당신도, 그대도, 우리도, 모두 외로운 것을.
모두 외로워 사랑을 찾지만 결국 다시 외로워 지는 것을.
이 필연의 과정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을.


안녕, 외로움이여, 내 그리움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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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줄리어스

어머니

2008/02/04 07:11
어느 날 문득 어머니의 손을 잡았을 때
어제의 곱고 부드러운 그것이
오늘은 검버섯이 핀 거칠고 늙어버린 손이라는 걸 알았다.
왜 이리 늙으셨냐고, 왜 이리 야위신건지
묻고 싶었지만 사실 나는 그 답을 알고도 모른척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줄곧 내게 당신은 나의 뿌리라 하셨다.
세상의 모든 자식은 어미의 줄기요, 잎이라서
하늘을 향해 뻗어 나아가는 자식을 위해
어미는 더욱 더 고개를 숙인다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인지
혹은 이제서야 어머니의 사랑, 그 무한한 깊이의
한 척을 잰 것인지 나이를 점점 더 먹어갈수록
어머니를 생각하면 전보다 쉬이 눈물이 흐른다.


겨울바다 앞에서 술에 취해 하늘을 보니
수없이 많은 별들 속에서도 어머니의 짙은 그리움을
좇을 수 있었다. 그런 내게 어머니는 당신의 행복이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 나라고 대답했다.


세월은 무던히도 흘러간다. 나란히 빠진 앞니를 보며 웃던 그 때로부터
사랑니가 나서 턱이 쓰라린 오늘로 쉬지 않고 달려왔다.
나는 어머니의 젊음을, 열정을, 자애를 먹고 살았다.
내 얼굴에 살점이 오르고 키가 커질수록 어머니의 등은 굽고 얼굴에는
주름이 생겨난다. 왜 나를 낳아 이리 날 고생을 시키냐는 말은 하였어도
봄의 햇빛과 가을의 오색단풍을 보게 해준 것이 고맙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뼈에 사무친다는 말이 있다. 어머니란 세 글자는 나의 모든 곳에 사무친다.
움직일 때마다 심지어는 생각을 할 때 조차 사무친 당신에 대한 존경은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다. 아아! 왜 이리 나는 못난 자식인가!


메마른 방바닥에 눈물 한 방울 떨어지며 나는 오늘도 그 속에서 어머니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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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줄리어스

참말로 이별하였다.

2007/10/31 02:51

#.
이별은 결코 불가항력하지 않다.
이별한다는 것은 그 대상 간 현재의 관계가 지속되는 것이
그러지 않을 때보다 예상되는 빈도나 강도가 더 부정적 의미가 있을 때
선택되는 방법의 하나이다. 이는 본인에게 슬기로운 처사이나
대상 간의 특정 관계가 종결된다는 의미를 담기 때문에 최후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많은 관계자들이 이별을 택하기에 앞서 최선책을 강구하지 아니하고
섣부른 이별을 선택하는 경우가 잦다.

따라서 이별을 한 후에 종종 많은 이들이 후회를 하게 된다.


#.
혼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참 편한 일이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나는 나에게만 집중을 하면 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전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로부터 시작되어 나에게 귀결되는 에너지의 흐름속에
어쩌면 나르시시즘, 무기력, 무비판, 수동적, 황폐화, 우울함 등
스스로를 옭아매는 부당한 세력이 끼어들었을 경우,

자신이 이를 온전하게 치유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
이별을 겪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정한 객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다. 엄밀하게 따져볼 때 그들의 관계가 종결하지
않았을 때에도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 그 때 의미 부여된 개체는
제 성질을 잃지 않고 이별 후에도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비단 이러한 생성뿐만 아니라 이별 후에야 비로소 창조되는 개체들도
더러 있다. 이 때 사람들은 애절한 감정을 겪게 되고 의미 부여된
개체는 추억이라 명칭 한다. 추억의 객체는 물체, 사상, 음악, 향 등
추억의 주체로서 존재하는 이와 관련된 모든 총체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추억은 부여된 의미를 사유하는 과정에서 만남을 영위하던 시점을
회상하게 만든다. 이 때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사유를 하게 되는 근거는
추억의 의미가 주체에게 전달됨에 따라 생성되는 감각이다.

추억으로 말미암아 그리움을 느낄 때 이를 긍정적인 사유로 봐야 될 것인지는
잘 알지 못한다. 적어도 미워하는 사람에게 그리움을 느끼지 않으니 그 타당성이
있어 보이긴 하다. 그리움이 무엇이든 간에 서럽긴 매 한 가지다.


#.
현대 의학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이제는 기억을 조작하는 것쯤은
심리학에서 쉬운 편에 속한다. 그러나 기억을 지우는 것은 조금 다르다.
물론 전자도 윤리적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으나 후자는 더욱 더 그러하다.
윤리적인 문제를 떠나 실제로 기억을 지우는 수술을 한 뒤 수술의 대상이 되는
기억 외에 특정한 기억이 부가적으로 지워졌는지에 대한 조사는 완벽하게 이뤄질 수 없다.
따라서 이는 현대 의학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해도 시술되어서는 안된다.
결국 이별을 한 대상을 완벽하게 잊는 방법은 없다.
기억해 내지 못한다고 할 때 이를 두고 잊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간에 기억을 재생산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설령 조작된 기억이라고 할 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헤어진 이를 잊을 수 없다. 습관처럼 여기던 것을 버림으로써
덜 생각할 수는 있다. 어찌 잊을 수 있으리요, 잊은 척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은
새로운 만남에 대한 불문의 예의일 뿐 그것이 합리화되지는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잊음의 또 다른 표현이라면 그러하라. 잊어라. 잊었다고 말하라.
허나 결코 기억에서 지울 수는 없다. 평생토록 안고 가야 하는 짐으로 존재하는 까닭은
그만큼 경솔한 행동에 대한 불멸의 추궁인 셈이다.


#.
티라미스를 먹을 때마다, 클라레를 마실 때마다 너를 기억하리.
봄날 환한 햇볕을 쬐일 때마다, 여름 시원한 빗줄기가 내릴 때마다,
가을 만개한 구절초 향내 맡을 때마다, 겨울 설국의 능선을 탈 때마다,
나 너를 기억하리. 진심으로 정을 주었던 너를 기억하리.

내일을 모르면서 영원을 약속한 겁없던 나의 오만을 어여삐 여기고,
울리기를 제 망나니 꽃 꺾듯 쉬이 하던 나를 이해로 안고,
배려하기를 강가의 모난 돌처럼 드물어도 귀히 날 만지는,
나 너를 기억하리. 사라지지 않는 정으로 너를 기억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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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줄리어스
산천은 온통 고까옷을 빼입고 저마다 아름다움을 경쟁한다.
회색빛 아스팔트를 벗어나면 짙은 흙내 가득한 대지가 있고 그 위로 적색의 단풍이 소복하게 쌓인다.
그중에 하나를 지그시 주워 ‘무진기행’에 끼운다. 수면제를 품고 있는 바람이 내게도 스친다.
가을이다. 어느새 오후 여섯 시가 되면 날이 저무는 계절이 되었다.

나는 오늘도 불그레한 건물을 향해 힘찬 걸음을 내디딘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회전문을 보며 사유한다.
회전문 앞이 무의 현실이라면 이상향의 도서관을 통해 유를 창조하여 현실로 복귀하는 것,
BONUS INTRA MELIOR EXI 의 객체로서 존재하는 도서관, 그 도서관이 바로 나의 레종데트르다.


도서관에서 많은 지식 활동이 이루어진다. 어떤 이는 토익 공부를 하고 있고
다른 이는 공무원 공부를 한다. 나는 가방에서 ‘88만원의 세대’를 꺼내 읽는다.
제각기 방법은 다르지만 지적 욕구의 충족이라는 개념에서 살펴 볼 때
모두 같은 목적을 달성키위한 구체적 수단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도서관은 그의 자식들을 차별하지 않는다.
입시 시험을 준비하는 자식이 고전 소설을 읽는 자식보다 열등할 리 만무하다.
어머니, 도서관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푼다.
자신을 통해서 지식의 갈망을 만족하고 부차적인 혜익을 얻는 자식들에게
시공간을 초월한 배려의 따스한 기운으로 그들을 감싼다.


자식이란 것이 대개가 그렇듯 극진한 어미의 마음을 모른 채 지내기가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미는 능소화 떨어지고 설국의 계절이 와도
여전히 마음 씀씀이를 줄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꽤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다. 이사하기 전에는 1,500권 정도의 책이 있었으나
지금은 300권 정도만 남아있다. 엄밀하게 따지면 나의 책이 아니라 ‘어머니’와 나의 책이다.
이사를 하면서 소장 권수가 극히 줄어든 것은 남 줘 버리거나, 분실했기 때문이리라.

책 좋아하는 어머니를 둔 덕택에 자연스레 독서에 대한 취미가 밝았던
나는 스물 안팎이 되었을 때 책 모으는 재미에도 푹 빠져 버렸다.
시월에 구입한 책이 스무권을 넘으니 그 수집욕이 염려될 만큼 크다.

책을 살 때 몇 가지 나름의 원칙이 있다. 양장본을 살 것, 표지에 현혹되지 말 것, 서문을 볼 것,
번역이 잘 된 책을 살 것 등.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번역과 관련된 문제이다.

예를 들어 ‘삼국지’의 경우 이문열, 황석영, 장정일, 리동혁 등 수많은 역자에 의해 번역되었다.
역자에 따라 그 내용도 각양각색이다. 어떤 책에서 기술되지 않은 부분이 다른 책에서는
상세히 씌인 경우도 잦다.

이럴 때 나는 주저하지 않고 도서관에 간다. 직접 보고 비교하는 것만큼 최상의 방법도 없다.
특히나 고전 문학의 경우, 대표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수많은 번역본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 대학 도서관에서 비교를 통해 옥석을 가릴 수 있다.

나는 책을 구매할 때 주로 온라인을 이용한다.
온라인이란 것이 배송기간이 하루, 이틀 걸릴 때도 있지만 사흘, 나흘을 넘어
기약없이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에도 도서관에 소장된 책을 미리 읽어봄으로써
기다림의 지루함을 해소한다.

간혹 서적 중에서 영상 자료가 함께 나온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영상 자료
-영화-가 더불어 출시되었다.
이 경우 도서관을 통해 개인의 추가적인 구입 없이도 해당 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

어디 이뿐이랴, 개인이 전부를 소장하기에는 서적의 종류가 겉가량으로 보아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고도의 배경지식이 요구되는 책 한 권을 ‘먹기’위해 그의 요구가 되는 책들을 모두 구입하는 것은
현실적인 제약이 뒤따른다. 도서관은 사분사분하게 수저를 챙겨준다. ‘먹기’ 쉬우라고.


날 참 좋다는 내 말에 “날 좋은 날에 책은 읽어 무어하냐?” 는 친구의 가드락한 말에 일리가 있다.
허나 소풍이라도 가는 것이 어떠냐는 고견에는 동조를 하지 못한다.

나는 책 속에 끼워 둔 단풍의 색을 닮은 사각의 건물에 처박힌 것이 아니다. 도서관은 허브다.
나는 이 곳에서 수많은 저자의 세계를 탐험하고 대가로 지적 욕구의 배부름을 얻는다.

지난 4년 간의 대학 생활을 통해 체득한 것 중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비판적 사고다.
이것이 가능한 까닭은 도서관이 있기 때문이다.

끝없는 지적 욕구의 충족과 비판적 사고의 근간으로서
존재하는 도서관은 나의 어미요, 나의 레종데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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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줄리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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